유럽 대학, AI 논의를 캠퍼스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 신뢰와 공공 가치를 위한 '협력적 AI 리터러시'의 시대

유럽 대학들이 생성형 AI 도입 실험 단계를 지나 전략과 가이드라인, 컴플라이언스 체계 구축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하지만 스웨덴 출신의 AI 정책 전문가 레나 홀름베리(Lena Holmberg)는 이런 변화가

유럽 대학, AI 논의를 캠퍼스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 신뢰와 공공 가치를 위한 '협력적 AI 리터러시'의 시대
AI 생성 이미지
eua.eu 보도 | 1 day ago 유럽 대학, AI 논의를 캠퍼스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 신뢰와 공공 가치를 위한 '협력적 AI 리터러시'의 시대

유럽 대학들이 생성형 AI 도입 실험 단계를 지나 전략과 가이드라인, 컴플라이언스 체계 구축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하지만 스웨덴 출신의 AI 정책 전문가 레나 홀름베리(Lena Holmberg)는 이런 변화가 대학 내부의 준비성과 위험 관리에 너무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진짜 과제는 캠퍼스 안팎의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AI가 만들어낼 사회적 전환을 설계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유럽대학협회(EUA) 보고서가 제시한 핵심 원칙과 맞물려, 이제 '협력적 AI 리터러시(collaborative AI literacy)'가 대학의 새로운 인프라로 떠올랐다.

AI 전략, 내부 시스템을 넘어 사회로 확장돼야

지난 1년여 동안 유럽 대학들의 AI 대응은 놀라울 정도로 일관된 패턴을 보였다. 수업과 평가, 연구 무결성, 데이터 보호, 행정 시스템 등 주로 대학 내부 운영과 관련된 영역에서 정책과 가이드라인이 쏟아져 나왔다. 스웨덴에서도 고등교육 부문은 AI 리터러시, 도구 접근성, 연구 활용, 교육, 시험, 행정 영역을 중심으로 정책 논의를 진행해 왔다.

문제는 이런 논의의 큰 축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홀름베리는 대학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핵심 미션 영역에서 AI 논의가 사실상 빈 공간이었다고 꼬집었다. 협력은 다른 책임의 연장으로 늦게, 간접적으로 등장할 뿐이었다.

이런 흐름은 위험 신호다. 대학이 비판적 사고, 학술 자유, 책임성, 공공 신뢰라는 전통적 가치를 고수하려 한다면, 그 가치는 캠퍼스 바깥의 협력에서도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2025년 유럽대학협회가 발표한 '대학의 필요와 가치를 위한 AI' 보고서도 이런 관점을 지지했다. 보고서는 AI 도입이 기술적 가능성만으로 움직여서는 안 되며, 대학의 핵심 가치가 길잡이가 돼야 한다고 명시했다.

결과적으로 대학의 AI 전략은 교육과 연구에 머물 수 없다. AI가 협업, 신뢰, 공공 가치를 어떻게 재편하는지, 그리고 이런 변화를 누가 주도할 것인지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 AI가 사회적 의사결정의 일부가 된 시대에 대학은 최종 정답을 생산하는 기관이 아니라, 약한 신호를 해석하고 불확실성 속에서도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의미 형성 인프라(sensemaking infrastructure)'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홀름베리의 핵심 주장이다.

협력의 인프라, AI가 만들면서 흔든다

AI는 이미 대학 외부의 협력 방식을 바꾸고 있다. 대학의 파트너 기업, 공공기관, 시민사회 조직들이 AI를 활용해 연구를 검색하고 요약하며 해석한다. 연구, 인재, 자금, 규제, 공공서비스가 점점 AI를 매개로 작동하는 네트워크 안에서 대학은 더 이상 고립된 지식 생산자가 아니다. 가치를 만들어내는 광범위한 네트워크의 한 구성원이다.

이런 변화에는 분명 기회가 따른다. AI는 이해관계자 의견을 종합하고, 지식 격차를 지도화하며, 연구를 번역하고, 새로운 파트너를 발굴하며, 시나리오 분석을 지원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홀름베리는 AI가 캠퍼스 내부를 넘어 대학의 협력 인프라 자체로 작동할 가능성에 주목했다. 생태계 전반을 '보고, 연결하고, 학습하는' 능력을 강화하는 방향이다.

다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협력은 결국 신뢰, 일상적 관행, 공유된 언어, 장기적 관계 위에 쌓이는 관계적 인프라다. AI가 불확실성을 평탄화하고, 편향을 재생산하며, 데이터와 도구를 가진 행위자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 수 있다. 협력이 중립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동시에 실제로는 비뚤어진 권력 관계를 가릴 수도 있다.

더 근본적인 위험도 존재한다. 대학이 만들어내는 지식은 접근성이 높아질 수 있지만, 동시에 맥락에서 분리될 경우 오독의 위험에 더 노출된다. 학문적, 방법론적, 윤리적 맥락이 빠진 채 AI로 요약되고 전달된 연구는 오용의 표적이 되기 쉽다. 따라서 진짜 질문은 대학이 AI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도입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지식을 강화하고 사회적 신뢰를 높이는 방향으로 AI 전환을 설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협력적 AI 리터러시, 대학의 새로운 핵심 역량

홀름베리가 제시한 가장 주목할 만한 개념은 '협력적 AI 리터러시'다. 개인이 AI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차원을 넘어, 다양한 행위자가 함께 AI의 사용을 묻고 비판하며 거버넌스에 참여할 수 있는 공유된 능력이라는 뜻이다.

이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AI 정책이 흔히 빠지는 함정을 짚어주기 때문이다. 대학 내부에서 AI 리터러시 교육과 가이드라인을 강화하는 것과, 대학이 외부 파트너들과 함께 AI의 사회적 영향을 논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후자는 공공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인프라를 요구하며, 단기 프로젝트가 아니라 장기적인 관계 구축을 전제로 한다.

특히 EUA 보고서가 강조한 '대학 가치 중심 접근'은 이 점에서 시사점이 크다. 기술이 먼저고 가치는 나중에 조율하는 방식은 AI가 사회적 의사결정 깊숙이 자리 잡은 지금 시점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대학이 어떤 AI 도입 원칙을 채택하고, 어떤 파트너와 협력하며, 어떤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느냐가 곧 대학의 정체성과 공공적 역할에 대한 선언이 된다.

에듀테크 업계에 던지는 질문들

이 논의는 유럽 대학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의 대학과 에듀테크 업계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진다.

첫째, 대학의 AI 정책 논의가 교실과 행정실을 벗어나 산업, 공공, 시민사회와의 접점으로 확장돼야 한다. 국내에서도 생성형 AI 도입 가이드라인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지만, 대부분 교수·학습과 연구윤리 중심이다. 대학과 기업, 공공기관이 함께 AI 활용 원칙과 위험 관리 기준을 만들어가는 '협업 거버넌스'가 다음 단계의 과제다.

둘째, AI 리터러시는 더 이상 개인의 역량 차원에서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 대학 구성원 전체가 AI를 비판적으로 질문하고 함께 활용하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단순 도구 사용법을 넘어 '이 데이터를 이렇게 활용해도 되는가', '이 결과가 어떤 사회적 편향을 재생산할 수 있는가'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조직문화와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셋째, 에듀테크 기업들의 역할도 재정의돼야 한다. AI 기반 학습·연구 도구를 공급하는 입장에서, 대학 내부 효율화만이 아니라 대학이 사회와 맺는 신뢰 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설계할 책임이 커지고 있다. 데이터 거버넌스, 편향 검증, 맥락 보존 기능 등은 이제 '옵션'이 아니라 대학이 파트너로 선택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핵심 기준이다.

홀름베리의 글은 결국 단순한 AI 도입 안내가 아니다. AI 시대에 대학이 어떤 사회적 기관으로 남을 것인지를 묻는 질문이다. 기술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일수록, 캠퍼스 안팎의 협력과 신뢰를 얼마나 단단하게 쌓느냐가 대학의 미래 가치를 가를 것이다. 한국의 교육당국과 대학, 에듀테크 업계가 이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놓느냐가 향후 5년간의 경쟁력을 결정짓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