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학문위원회, 생성형 AI 시대의 대학 교육 방향 제시…'지적 주권' 개념을 축으로

올해 7월, 독일 학문위원회(Wissenschaftsrat, WR)가 생성형 AI 시대의 고등교육을 위한 권고안(Intellektuelle Souveränität: Empfehlungen für die Hochsch

uni-frankfurt.de 보도 독일 학문위원회, 생성형 AI 시대의 대학 교육 방향 제시…'지적 주권' 개념을 축으로

올해 7월, 독일 학문위원회(Wissenschaftsrat, WR)가 생성형 AI 시대의 고등교육을 위한 권고안(Intellektuelle Souveränität: Empfehlungen für die Hochschulbildung in Zeiten von generativer KI)를 공식 발표했다. 이 권고안은 대학과 관련 기관이 생성형 AI를 어떻게 수용하고 활용할 것인지를 둘러싼 전 세계적 논의의 흐름 속에서, 유럽 주요 학술단체가 내놓은 최초의 포괄적 가이드라인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권고안의 핵심 키워드인 '지적 주권(Intellectual Sovereignty)'은 기술 도구 앞에서 인간의 사유 능력과 자율성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대한 유럽식 응답이다.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는 이 권고안 작성에 직접 참여했으며, 이미 자체적인 AI 활용 규정과 로드맵을 선제적으로 마련해 대응에 나서고 있어 관심이 집중된다.

이번 권고안의 가장 큰 의의는 생성형 AI를 단순한 교육 보조 도구로 보지 않고, '학문적 사유 그 자체의 변혁'을 촉발하는 변수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독일 학문위원회는 생성형 AI가 학생의 독립적 사고력을 약화시키고, 역량 상실을 가져오며, 잘못된 정보의 확산을 조장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동시에 지식 자원에 대한 접근성 개선, 학습 지원의 개인화, 피드백 방식의 혁신, 교수 학습 자료의 창의적 설계, 접근성과 포용성 확대 등 무궁무진한 기회도 함께 존재한다는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했다. 권고안의 저자 중 한 명인 괴테대학교 컴퓨터과학부 교수이자 studiumdigitale의 전무이사인 헨드릭 드락슬러(Hendrik Drachsler) 교수는 교육기술 및 학습분석 분야의 권위자로, 이번 권고안에 실무적 깊이를 더했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권고안이 단순히 'AI 활용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학 구성원 전체가 공유해야 할 '기본 자세(grundlegende Haltung)'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 학문위원회는 △자율성(Autonomie) △비판적 성찰(Kritische Reflexion) △과도한 단순화에 대한 저항(Widerstand gegen Vereinfachung)을 권고안의 세 기둥으로 삼았다. 이는 기술 수용 과정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도구 결정론(instrumental determinism)'을 경계하고, 인간 주도의 교육 철학을 견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권고안의 제목이 '지적 주권'으로 굳어진 것도 이런 맥락에서 자연스럽다. 지식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AI에 의해 수동적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AI를 자신의 사유를 확장하는 도구로 선별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괴테대학교는 권고안 발표 이전부터 이 방향성을 선제적으로 실천에 옮긴 대표적 사례다. 대학은 학사 과정과 시험에서 AI를 활용할 수 있는 영역과 원칙을 정리한 새로운 프레임워크 규정을 도입했고, 학생들에게 AI 사용에 대한 투명한 공개와 문서화를 의무화했다. 단순히 금지하거나 전면 허용하는 양극단적 선택지가 아니라, 과목별 특성에 맞춘 유연한 표준을 적용하면서도 책임의 원칙을 명확히 한 것이다. 나아가 괴테대학교는 현재 '책임(Responsibility)',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실험 문화(Culture of Experimentation)', '대화(Dialogue)', '역량 강화(Empowerment)'라는 다섯 가지 핵심 축을 중심으로 한 '학생 및 학술서비스를 위한 AI 로드맵' 수립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는 교육 당사자뿐 아니라 행정 서비스 전반에 AI를 통합하려는 시도로, 유럽 주요 대학 가운데 비교적 본격적인 체제 정비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권고안의 의의와 괴테대학교의 선도적 사례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장에서 '지적 주권'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작동하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첫째, 교수자 간 AI 리터러시 수준의 격차다. AI 활용 능력이 교수자에 따라 천차만별인 상황에서, 비판적 사고를 유도하는 수업 설계는 결국 담당 교수의 역량에 좌우된다. 둘째, 평가 시스템의 재설계 문제다. 생성형 AI가 보편화된 환경에서 전통적인 과제물 중심의 평가는 의미 있는 학습 성과를 측정하기 어려워지며, 과정 중심 평가, 포트폴리오, 구두 면담 등 새로운 평가 방식의 도입이 불가피해진다. 셋째, 학생의 AI 의존도를 지속적으로 측정하고 개입하는 학습분석(Learning Analytics) 체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드락슬러 교수가 권고안 작성에 직접 관여한 것도 이런 진단과 무관하지 않다. 학습분석 분야 전문가인 그가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가, AI 시대 대학 교육의 품질 관리가 전통적 수업 관행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학문위원회가 인식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지난주 서울대학교 AI교육위원회가 전국 주요 대학의 AI 활용 현황을 조사해 발표했고, 교육부도 'AI 디지털교과서' 정책을 내년부터 본격 확대하겠다고 밝히는 등 한국도 AI와 교육을 둘러싼 정책적 전환점을 맞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논의는 아직 '도구 도입'과 '윤리 가이드라인'에 머물러 있는 측면이 강하다. 대학 본연의 교육 철학과 학문적 정체성을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지에 대한 거시적 성찰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독일 학문위원회의 '지적 주권' 담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 대학과 교육 당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술이 바꾸는 것은 교수·학습 방법론의 차원을 넘어, 학문의 의미와 대학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 재질문이다. 개별 대학의 규정 정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AI 시대에 어떤 교육을 통해 어떤 인재를 길러낼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철학적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괴테대학교의 사례가 보여주듯, 변화는 단일 기관의 독자적 노력보다는 국가 차원의 권고안과 대학의 현장 혁신이 맞물릴 때 비로소 실효성을 갖는다. 한국의 에듀테크 업계와 교육정책 입안자도 기술 속도에만 맞추지 말고, 유럽의 사례에서 출발한 이 논의의 본질적 메시지를 곱씹어볼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