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이 서울로 부른 19개국, 한국 에듀테크의 '수출 문법'이 바뀌고 있다]
세계은행이 개발도상국 교육 정책 담당자들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지난달 31일부터 이달 4일까지 서울 여의도 글래드호텔에서 열린 'Global EdTech Policy Academy on AI' 연수에는 에티오피아,
platum.kr 보도 | 1 week ago [세계은행이 서울로 부른 19개국, 한국 에듀테크의 '수출 문법'이 바뀌고 있다]
세계은행이 개발도상국 교육 정책 담당자들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지난달 31일부터 이달 4일까지 서울 여의도 글래드호텔에서 열린 'Global EdTech Policy Academy on AI' 연수에는 에티오피아, 캄보디아, 케냐, 키르기스스탄 등 19개국 교육부 관계자와 한국교육학술정보원 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 단순한 국제 컨퍼런스가 아니라, 한국 에듀테크 기업들이 개발도상국 교육 시장의 '정책 파트너'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자리였다. 에누마 코리아와 프리윌린이 이 무대에 섰다는 사실은 한국 에듀테크의 해외 진출 방식이 개별 서비스 수출에서 공적개발원조(ODA) 연계형 인프라 수출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행사는 세계은행 교육·역량개발 글로벌 프랙티스가 영국 외무영연방개발부 등과 공동 주최한 연수의 일환으로 기획됐다. 3일에는 재정경제부와 세계은행이 '한-세계은행 협력기금 연례 성과 공유 행사'를 함께 열었고, 2일과 3일에는 참가 기업 9곳의 부스가 운영됐다. 주목할 점은 세계은행이 한국을 연수 장소로 택했다는 사실 자체다. 세계은행은 그동안 에듀테크 정책 연수를 주로 미국이나 영국에서 개최해왔다. 한국이 '교육 시스템 수출국'이자 '에듀테크 실증 국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읽힌다. 한국은 전 국민 디지털 교육 인프라와 AI 디지털교과서 도입 논의를 동시에 진행 중인 몇 안 되는 국가다. 개발도상국 입장에서는 '선진국보다 참고하기 쉬운 모델'로서 한국의 위치가 부각된 셈이다.
기업들의 발표 내용도 이전과 결이 다르다. 에누마 코리아는 인터넷 연결 없이도 작동하는 기초학습 프로그램 '에누마스쿨'을 선보였다. 문해력과 수리력을 학습자 수준에 맞춰 제공하는 이 서비스는 코이카와 함께 2022년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올해 6월까지 800여 개 초등학교와 교육기관에 도입됐다. 학생 3만 5,000여 명이 이용했고, 도입 학교의 61%가 지리적 여건과 교육 인프라가 열악한 소외 지역에 있다. 에누마 인도네시아 법인은 2023년부터 인도네시아 초·중등교육부의 민관협력 파트너로 참여해 올해 7월 표창을 받았으며, 같은 달 유니세프 '블루유니콘 포트폴리오'에 선정돼 탄자니아에서 학교 밖 청소년 대상 12주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김현주 에누마 코리아 사업본부장은 기초학습역량과 함께 디지털 리터러시 역량을 길러주는 것을 차별점으로 내세웠다.
프리윌린은 수학 교육 서비스 '스쿨플랫'을 시연했다. 교사의 수업 설계와 학생별 맞춤 학습을 동시에 지원하는 구조로, 2025년 기준 17개 시도교육청 3,641개 학교에서 교사 1만 2,000여 명과 학생 350만여 명이 누적 이용했다. 현장에서는 학생별 개별화 콘텐츠와 교사가 직접 만든 콘텐츠를 병행하는 방식, 그리고 다른 언어권으로의 확장 가능성에 관심이 집중됐다. 프리윌린이 지난해부터 진행해온 우간다 수학 교육 지원 사업도 세계은행과 아프리카 지역 교육 관계자들의 질문을 끌어냈다. 수학 학습 지원과 교사 교육 협력 가능성이 논의됐고, 부스에서는 무료 개방 학습 서비스 '오픈플랫'도 소개됐다. 권기성 프리윌린 대표는 한국을 넘어 더 많은 나라의 학생과 교사에게 교육 기회를 확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두 기업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첫째, 이들은 'B2C 앱 수출'이 아니라 'B2G(정부 대상) 솔루션 수출' 모델을 택했다. 에누마는 인도네시아 교육부, 프리윌린은 우간다 현지 사업을 통해 각국 정책 결정권자와 직접 접점을 만들었다. 둘째, 양사 모두 코이카나 세계은행 같은 국제 개발 협력 채널을 활용했다. 이는 개별 기업의 마케팅 역량만으로는 뚫기 어려운 개발도상국 교육 시장의 진입 장벽을 공적 자금과 국제기구 네트워크로 우회하는 전략이다. 셋째, 두 서비스 모두 '인프라 제약'을 전제로 설계됐다. 에누마스쿨의 오프라인 작동 기능은 전력과 인터넷이 불안정한 지역을 겨냥한 것이고, 프리윌린의 교사 주도 콘텐츠 생성 기능은 교사 역량 편차가 큰 환경을 고려한 것이다. 한국의 앞선 인프라에서 검증된 서비스를 그대로 이식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지 제약 조건에 맞춰 재설계하는 '역방향 현지화'가 이들의 공통된 수출 문법이다.
이번 행사가 에듀테크 업계에 던지는 시사점은 세 가지다. 첫째, 에듀테크 수출의 주된 통로가 민간 시장에서 공적 개발 협력으로 이동하고 있다. 세계은행과 각국 교육부가 한국 기업을 직접 호출했다는 사실은, 국내에서 검증된 에듀테크 역량이 국제 개발 의제와 결합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음을 뜻한다. 둘째, 'AI'가 이번 연수의 핵심 키워드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발도상국들도 이제 단순한 디지털 교육 인프라를 넘어 AI 기반 맞춤 학습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국이 AI 디지털교과서 정책을 본격화할수록, 그 경험 자체가 수출 자산이 될 수 있다. 셋째, 기업 입장에서는 ODA 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새로운 경쟁력이 됐다. 코이카, 세계은행, 유니세프 등과의 협업 경험은 단기 매출로 직결되지 않지만, 5~10년 단위의 시장 선점 효과를 만든다.
다만 과제도 뚜렷하다. 개발도상국 교육 시장은 결제 인프라와 예산이 취약해 민간 수익 모델만으로는 지속가능성이 낮다. 공적 자금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사업 연속성은 국제 정치와 원조 예산 변동에 좌우될 위험이 있다. 에누마와 프리윌린이 보여준 성과는 분명 고무적이지만, 이것이 '전시성 성과'에 그칠지 '지속가능한 수출 모델'로 정착할지는 앞으로 2~3년의 후속 계약과 현지 운영 성과에 달려 있다. 세계은행이 서울을 택한 것은 한국 에듀테크에 주어진 기회이자, 그 기회를 실제 성과로 증명해야 하는 시험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