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부추기는가, 해결할 수 있는가: ‘4세 고시’부터 ‘초등 의대반’까지, 사교육 시장의 변곡점

AI가 부추기는가, 해결할 수 있는가: ‘4세 고시’부터 ‘초등 의대반’까지, 사교육 시장의 변곡점

khan.co.kr 보도 | 2 days ago

AI가 부추기는가, 해결할 수 있는가: ‘4세 고시’부터 ‘초등 의대반’까지, 사교육 시장의 변곡점

[도입부] 한국 나이로 겨우 4세가 유명 영어유치원 입학을 위해 치르는 ‘4세 고시’, 초등학교 3학년이 중학교 1학년 수학을 배우는 ‘초등 의대반’, 고3과 N수생을 위한 300만원대 월 수강료와 멘탈 관리 독서실. 이 모든 것이 현재 한국 사교육 시장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학령인구는 500만 명 아래로 떨어졌지만, 사교육비 총액은 27조원을 넘나들며 역대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최근 발표한 '2026 사교육 실태 백서'는 이 사교육 시장이 더 어릴 때부터, 더 세분화된 상품으로, 더 비싼 가격표를 달며 변형되고 있음을 고발한다.

[본문 1] 백서가 지적하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저연령화’와 ‘프리미엄화’다. 영어유치원은 2018년 562곳에서 지난해 820곳으로 급증했으며, 월평균 수업료는 150만원을 웃돈다. 수학 학원에서는 초등 3·4학년이 중1 과정을, 5학년이 중3 과정을, 6학년이 고1 과정을 선행 학습하는 것이 기본 커리큘럼으로 자리 잡았다. 단순한 선행을 넘어, 최상위권 학생을 겨냥한 고난도 문제 풀이, 수능 모의고사 PDF 제작 시장, 강사 1인당 20~30명의 조교를 두는 ‘프리미엄 강의’ 등 시장은 더욱 세분화되고 고도화됐다. 이는 학령인구 감소 속에서 학원들이 생존 전략으로 객단가를 높이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수요자인 학부모는 자녀 수가 1~2명으로 줄어들면서 집중 투자하는 경향을 보이고, 사회적 양극화 속에서 ‘대학 레벨’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이 고액 사교육을 지탱한다.

사교육 시장 내부의 양극화도 심화하고 있다. 대형 학원들은 인강, 지역 센터, 기숙학원 등으로 대기업화하며 자본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장악하는 반면, 지역의 소규모 보습형 학원은 수강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교육의 본래 기능인 ‘학교 교육 보충’이 무너지고, 오히려 최상위권 학생에게 유리한 ‘선별적 사교육’만 살아남는 구조다. 백서에 따르면 유명 대형 학원들은 과학고나 영재고 출신, 상위권 대학 자퇴생 등 이미 검증된 학생에게 입학금 면제 등의 특혜를 주기도 하며, 이는 사교육 효과가 ‘있는 자’에게 더 유리하게 작용하는 순환 고리를 만든다.

[본문 2] 이 같은 현상의 배경에는 구조적 원인이 자리한다. 학부모 세대가 경험한 사교육 친화적 문화와 대학 서열화 고착화, 그리고 이공계·의대 쏠림 현상이 맞물렸다. 특히 최근 몇 년간 ‘N수생’이 급증하며 수능 사교육 시장은 더 정교해졌다. 종합반에서 쪼개진 내신 대비반, 영어 문법반 등 세분화된 강의, 그리고 수험생의 스케줄과 멘탈을 관리해주는 고가형 독서실까지 등장했다. 백서는 또한 ‘문해력 저하’ 우려가 오히려 수능 국어 문제 풀이형 학원 시장을 확대시키는 역설도 지적한다. 실제 독서·논술 교육보다는 고난도 비문학 독해 문제를 푸는 학원이 주를 이루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에듀테크, 특히 인공지능(AI)의 역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사교육 시장의 프리미엄화와 세분화는 AI 기술이 제공하는 ‘맞춤형 학습’의 가능성과 정확히 겹친다. AI 튜터는 학생의 취약점을 분석해 개인화된 문제를 제시하고, 학습 데이터를 기반으로 진도를 조절한다. 이는 기존 사교육이 ‘고액 프리미엄’ 상품으로만 제공하던 1:1 맞춤형 서비스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구현할 수 있는 기술적 토대다. 그러나 현실은 AI가 사교육 시장의 양극화를 오히려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상위권 학생용 고난도 문제 생성 AI, 수능 모의고사 자동 제작 시스템 등은 ‘돈이 되는’ 프리미엄 시장에 집중되어 배치되고, 공교육이나 저소득층 학생에게는 여전히 접근성이 낮다.

게다가 AI 기반 학습 플랫폼들은 학부모의 ‘사교육 의존성’을 더욱 정교하게 자극한다. 학습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제공하고 성장 곡선을 시각화하는 기능은 ‘내 아이가 뒤쳐지고 있다’는 불안을 증폭시켜 추가적인 사교육 지출을 유도하는 마케팅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백서가 지적한 학원들의 ‘불필요한 고난도 학습’ 유도 현상이 AI를 통해 더 체계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셈이다.

[시사점] 이러한 현실은 에듀테크 업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기술이 사교육 시장의 과열을 부추기는 도구가 아니라, 공교육의 신뢰를 회복하고 교육 양극화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는가? 사걱세는 이번 백서에서 ‘출신학교 채용차별방지법’ 제정,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통한 대학 서열 완화, 절대평가 전환, 영유아 학원 교습시간 제한 등 구조적 대안을 제시했다. 이 중 어느 하나도 쉽지 않은 과제지만, 에듀테크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 존재한다. AI 기반의 적응형 학습 시스템을 공교육에 전면 도입해 학교 내에서도 개인 맞춤형 학습이 가능하게 한다면, 고액 사교육을 통하지 않고도 학습 격차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AI가 생성한 피드백을 교사의 수업 개선에 활용한다면 교사의 전문성을 높이면서도 사교육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

에듀테크 기업들은 ‘프리미엄 시장’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공교육과의 협력 모델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자체나 교육청과 협력해 저소득층 학생에게 AI 학습 시스템을 무료 제공하고, 그 데이터를 익명화해 교육 정책 수립에 기여하는 ‘공공형 AI 에듀테크’ 모델을 고민할 시점이다. 기술의 발전은 불가역적이지만, 그 방향성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사교육 시장이 기술 발전을 따라 더 고도화되고 세분화되는 대신, 기술이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촉매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4세 고시’는 앞으로도 더 어린 나이로, 더 비싼 가격으로 진화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