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대학은 '흡수'할 수 있을까? — 유럽 고등교육의 경고와 한국에의 시사점
AI 시대, 대학은 '흡수'할 수 있을까? — 유럽 고등교육의 경고와 한국에의 시사점
media-and-learning.eu 보도 | 2 days agoAI 시대, 대학은 '흡수'할 수 있을까? — 유럽 고등교육의 경고와 한국에의 시사점
학생들이 교수의 허락 없이, 학교 시스템을 거치지 않고, 무료 혹은 저렴한 비용으로 고급 인지 능력을 손에 넣었다. 과거에는 몇 주가 걸리던 과제가 몇 분 만에 완성되고, 코딩 실력이 없던 학생들도 AI의 도움으로 프로그램을 짜낸다. 영국 런던혁신학교(LSI)의 소마예 아그니아 연구원은 이 상황을 두고 단순한 기술 도입 이상의 ‘근본적 불일치’라고 진단한다. 대학의 운영 리듬과 AI의 확산 속도가 완전히 엇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 고등교육계가 던지는 이 질문은 한국의 대학과 에듀테크 업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도적 통제’의 붕괴 — 과거와 다른 AI의 확산 패턴
역사적으로 고등교육은 새로운 기술을 ‘흡수’하는 데 능숙했다. 가상학습환경(VLE), MOOCs, 강의 녹화 시스템은 모두 한때 혁명적이라 불렸지만 결국 기존 구조 안에 편입되었다. 대학은 구매 결정, 인프라 투자, 정책 승인, 교수진 동의 등 일련의 ‘제도적 경로’를 통해 기술 도입 속도를 통제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대학이 선택한 후에야 해당 기술을 접했다. 대학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생성형 AI는 이 패턴을 완전히 깨뜨렸다. 아그니아 연구원이 지적하듯, AI는 제도적 중재 없이, 인프라 업그레이드 없이, 무료 또는 저비용 도구로 확산되었다. 대학이 ‘허용’하기 전에 학생들은 이미 챗GPT를 켜고 과제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속도의 차이가 아니다. ‘무엇에 접근할 수 있는가’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과거의 기술이 정보나 도구에 대한 접근을 제공했다면, AI는 ‘능력(capability)’ 자체에 대한 접근을 제공한다. 에세이 작성, 문제 해결, 코드 생성 등 이전에는 상당한 시간과 숙련이 필요했던 인지적 산출물을 즉시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템포 충돌(tempo conflict)’ — 시스템과 실천의 괴리
아그니아 연구원은 이 현상을 ‘템포 충돌’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대학은 수년 단위의 교육과정 주기, 안정성과 비교 가능성을 중시하는 평가 모델, 위원회와 합의에 기반한 거버넌스 프로세스 위에 설계되어 있다. 반면 AI는 빠른 반복, 지속적 개선, 즉각적인 확장성을 특징으로 한다. 결과적으로 제도적 구조와 실제 생활(lived practice) 사이에 점점 더 큰 괴리가 발생한다.
이 괴리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여전히 강의는 열리고, 과제는 제출되며, 학위는 수여된다. 그러나 그 표면 아래에서는 근본적인 긴장이 축적된다. 평가의 신뢰성은 흔들린다. ‘지식을 입증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언제든 AI가 능력을 대체할 수 있다면? 노력과 저자의 개념은 모호해진다. AI가 쓴 글과 인간이 쓴 글의 경계는 어디인가? 학문적 권위는 도전받는다. 핵심 능력이 대학 밖에 존재한다면, 대학 안에는 무엇이 남는가?
‘흡수’의 조건이 사라졌다
대학이 AI를 ‘흡수’할 수 있을지 여부는 몇 가지 조건에 달려 있다. 아그니아 연구원은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 기관이 접근을 중재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사용을 관찰하고 규제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능력이 어떻게 입증되는지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조건은 이 모든 것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많은 대학이 도입한 AI 탐지 소프트웨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탐지를 회피하는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고, AI 사용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을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단순 지식 재생산이 아닌, AI를 활용한 창의적 문제 해결, 비판적 사고, 윤리적 판단 등을 평가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유럽대학협회(EUA)는 2026-2027년 학습 및 교육 주제별 동료 그룹(Learning & Teaching Thematic Peer Groups)을 통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려 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교육의 본질을 재정의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한국 고등교육에의 시사점 — 위기인가 기회인가
한국의 고등교육 현장은 유럽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인터넷 인프라와 높은 디지털 리터러시를 자랑하지만, 동시에 입시 위주의 평가 시스템, 교수 중심의 수업 구조, 느린 의사결정 과정이라는 ‘템포 충돌’을 더 극명하게 겪고 있다.
특히 한국 대학의 경우, AI가 촉발한 ‘능력의 외부화’는 학위의 가치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기업들이 AI 활용 능력을 학위보다 더 중요시하기 시작하면, 대학은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실제로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특정 직무에서 학위 요건을 완화하고 실무 능력을 우선시하는 추세다.
그러나 이는 위기만은 아니다. 한국의 에듀테크 업계는 이 ‘틈새’를 기회로 삼을 수 있다. AI 튜터링 시스템, 맞춤형 학습 경로 추천, 실시간 피드백 도구 등은 기존 대학 교육의 한계를 보완할 잠재력을 지닌다. 문제는 대학이 에듀테크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기존 구조를 혁신할 의지가 있느냐는 점이다.
결론 — ‘생존’을 넘어 ‘주체적 항해’로
아그니아 연구원은 대학이 AI 시대를 단순히 ‘생존(survive)’하는 것을 넘어 ‘주체적 항해(act with genuine agency)’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수동적으로 기술을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기술을 거부하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접근이다. 대학은 AI가 변화시킨 조건 속에서도 교육의 본질적 가치를 재정의하고, 새로운 평가 방식을 실험하며, 학생들이 AI와 공존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고등교육계는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과거처럼 기술을 ‘흡수’하며 버티는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수 있다. AI가 만든 새로운 조건에 맞춰 시스템 자체를 재설계할 용기가 필요한 때다. 그것이 ‘생존’이 아닌 ‘진화’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