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디지털 교육, '보급의 거인'이라 '활용의 난쟁이'

한국 학생들이 집에서든 밖에서든 디지털 기기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기회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토록 뛰어난 접근성을 바탕으로 정작 교실 안에서 디지털

m-i.kr 보도 | 4 days ago 한국 디지털 교육, '보급의 거인'이라 '활용의 난쟁이'

한국 학생들이 집에서든 밖에서든 디지털 기기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기회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토록 뛰어난 접근성을 바탕으로 정작 교실 안에서 디지털 자원을 활용해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경험은 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라는 것이다. 기기와 인프라가 넘쳐나는 대한민국 교실이 왜 '창작의 공간'이 되지 못하고 있는지, 코딧 부설 글로벌정책실증연구원이 8일 발표한 이슈페이퍼가 정확히 그 물음을 파고들었다. PISA 2022 데이터를 다시 꺼내들어 한국의 디지털 교육이 어떤 함정에 빠져 있는지 짚은 이번 보고서는, AI 시대를 맞아 교육정책의 패러다임을 '보급'에서 '경험'으로 근본적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PISA 2022가 드러낸 한국의 아이러니

PISA 2022 조사 대상 43개국 가운데 한국 학생의 '학교 밖 디지털 자원 접근 기회'는 1위를 기록했다. 1인당 기기 보유 대수, 가정 내 인터넷 환경, 디지털 학습 자원 활용 가능성 등을 종합한 이 지표에서 한국은 단연 정상이었다. 한편 '수업 중 디지털 자원 활용도'는 정반대로 43개국 중 43위, 즉 바닥이었다. 학교 밖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디지털 자원을 손쉽게 만져볼 수 있지만, 정작 정해진 교과 시간 안에서는 교사가 이를 수업과 연결해 활용하는 빈도가 극히 낮다는 의미다.

연구원은 이 격차를 단순한 통계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 해석했다. 그동안 정부와 교육청이 쏟아부은 예산과 정책의 상당 부분은 기기 보급과 네트워크 인프라 구축에 집중되어 왔다는 것이다. 교실 한 칸에 스마트 기기가 들어오고, 전자칠판이 설치되고, 학습관리시스템(LMS)이 도입되면서 '디지털 교육'이라는 이름표는 붙었지만, 학생이 그 도구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만들어보는지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것이다. 결국 기기만 들고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과 교사가 만들어낸 풍경은, '디지털이 있되 디지털하지 않은' 모순으로 귀결된다.

창작·검증·수정, AI 시대 교실의 새 좌표

연구원이 이번 보고서에서 가장 강하게 내세운 키워드는 '창작 경험'이다. 단순히 AI 챗봇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받아 적는 행위를 넘어, 학생이 직접 디지털 도구로 결과물을 만들고, AI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수정하면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과정이야말로 AI 시대 교육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디지털 활용 능력'은 더 이상 컴퓨터 교과나 정보 교과의 전유물이 아니다. 저작권, 개인정보 보호, 윤리적 판단까지 아우르는 범교과적 핵심 역량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게 연구원의 시각이다.

실제로 산업 현장과 사회 전반에 생성형 AI가 빠르게 스며들면서, 결과를 단순히 '소비'하는 인재가 아니라 결과를 '설계하고 검증하며 책임질 수 있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AI가 쓴 답안을 그대로 제출하는 학생을 양성할 것이냐, AI의 한계를 짚어내고 자기 목소리를 더할 줄 아는 학생을 만들 것이냐는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현장의 현실: 격차·연수 부재·도구 파편화

그러나 보고서가 짚은 현실은 녹록지 않다. 첫 번째 과제는 지역과 학교에 따른 창작 경험의 격차다. 서울의 잘 정비된 학교에서 어도비와 구글 도구를 활용한 수업을 받는 학생과, 지방 소규모 학교에서 교사 한 명의 독박으로 이뤄지는 디지털 수업 사이에는 경험의 깊이부터 질까지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런 격차는 결국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른 디지털 격차를 학교 안으로 그대로 들여오는 결과를 낳는다.

두 번째는 교원 역량 문제다. 교사가 AI 기반 수업을 설계하고 학생의 창작 과정을 평가하는 일은 기존 교수법과는 결이 다른 전문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현재 교원 연수와 자료는 아직 '도구 사용법 안내'에 머물러 있어, 어떻게 하면 수업을 '창작 중심'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질적 지원이 부족하다는 평가다. 세 번째는 도구의 지속가능성 문제다. 무료 서비스나 단기 시범 사업 차원에서 도입된 도구들은 사업이 끝나면 학생의 작업물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학생이 중학교에서 익힌 디지털 환경이 고등학교에서 완전히 달라져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비효율도 만성적인 문제로 지적됐다.

부산 PENZ, 민관협력의 벤치마크 사례로

이런 가운데 보고서가 주목한 사례가 있다. 부산교육청이 구축한 통합 로그인 시스템 'PENZ'다. PENZ는 어도비,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산업 표준 클라우드와 생성형 AI 서비스를 교육청 차원에서 안전하게 연계한 플랫폼이다. 학생과 교사는 단일 계정으로 산업 표준 도구들에 접속할 수 있고, 학교가 바뀌어도 본인이 만들던 작업물과 학습 환경이 그대로 이어진다. 또한 부산교육청이 클라우드 이용에 따른 개인정보 보호와 콘텐츠 안전성 문제를 사전에 검토하고 관리 기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보고서는 이를 '민관협력의 모델'로 제시했다. 사실상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산업 표준 기반의 지속가능한 디지털 창작 인프라 사례라는 평가다.

'기기·기술 보급'에서 '경험의 보편화'로

연구원은 정책 방향에 대해서도 명확한 축을 제시했다. 첫째, 모든 교과에서 디지털 창작 경험을 보장하는 교육과정과 평가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 교사 한 사람이 떠안는 창작 교육을, 국어·사회·과학·미술 등 전 교과가 분담하는 구조로 재편해야 한다는 취지다. 둘째, 산업 표준에 기반한 민관협력과 교원 전문성 지원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어도비나 구글 같은 글로벌 플랫폼과 교육청·학교가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안전한 통로를 만들고, 교사가 이를 수업에 녹일 수 있도록 컨설팅과 연수를 체계화하라는 주문이다. 셋째, 개방성·안전성·지속가능성을 갖춘 디지털 창작 교육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부산 PENZ 같은 모델을 전국으로 확산하되, 학교 간 형평성을 맞출 수 있는 중앙 차원의 지원 장치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송해영 글로벌정책실증연구원장은 "이제 교육정책은 '기기·기술 보급'을 넘어 모든 학생이 지역·학교·사회경제적 여건과 관계없이 창작을 경험하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표현할 수 있는 환경 중심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학교에서의 창작 경험이 미래 역량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범용적이고 안정적인 디지털 창작 도구에 대한 접근 기회가 보장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에듀테크 업계에 던지는 메시지

이번 보고서가 에듀테크 업계에 주는 시사점은 명확하다. 그동안 국내 에듀테크 시장은 '기기·플랫폼·콘텐츠'라는 세 축 위에서 성장해왔다. 하드웨어와 LMS, 그리고 콘텐츠 공급업체들이 교육청 발주 사업과 학생 대상 서비스를 통해 시장을 키워왔다. 그러나 AI 시대를 맞아 시장의 무게중심이 '콘텐츠를 전달하는 채널'에서 '학생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경험의 장'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는 곧 업계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에 변화를 요구하는 신호탄이다. 단순히 학습 콘텐츠를 판매하거나 도구 사용법을 강의하는 기업이 살아남기 어려워지고, 학생의 창작 과정을 안전하고 지속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기업이 새로운 표준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또한 '민관협력'의 무게도 과거와는 결이 달라져야 한다. 그동안 공공 부문이 민간 서비스의 단순 고객이거나 일회성 사업의 발주처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산업 표준 도구를 교육 현장에 안전하게 이식하는 '조력자'이자 '설계자'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부산 PENZ 사례가 시사하는 것처럼, 교육청은 글로벌 플랫폼과의 데이터 계약, 개인정보 거버넌스, 도구 인증 체계까지 아우르는 플랫폼 운영자로 진화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번 보고서가 반복적으로 강조한 '창작 경험의 보편적 접근'이라는 문구는 결국 '교육 기회 평등'의 문제로 귀결된다. AI 도구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도구를 활용해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낼 줄 아는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 사이의 격차는 곧 사회적·경제적 격차로 직결된다. 에듀테크 기업, 정책 결정자, 학교 현장 모두가 이 격차를 메우지 못한다면, 한국 교육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접근성이라는 강점을 '잠재력'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보급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대한민국 교육이 풀어야 할 숙제는, 그 훌륭한 기기들을 마침내 학생의 손에서 의미 있는 창작으로 연결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