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과의 벽을 허문 UNIST의 도전, 'AI융합대학'이 던지는 고등교육의 화두

2027학년도부터 UNIST에 입학하는 신입생들은 낯선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조선해양공학을 전공하면서 인공지능(AI)을 함께 배우고, 우주항공에 관심이 있다면 AI를 활용한 위성 데이터 분석을 전공처럼 공부할 수

매일경제 보도 학과의 벽을 허문 UNIST의 도전, 'AI융합대학'이 던지는 고등교육의 화두

2027학년도부터 UNIST에 입학하는 신입생들은 낯선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조선해양공학을 전공하면서 인공지능(AI)을 함께 배우고, 우주항공에 관심이 있다면 AI를 활용한 위성 데이터 분석을 전공처럼 공부할 수 있게 된다. 학과라는 이름의 칸막이가 사라지고, AI라는 렌즈를 통해 산업 현장의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교육 체계가 출범하기 때문이다. UNIST가 기존 정보바이오융합대학을 'AI융합대학'으로 확대·개편하고, 학부 정원을 100명 늘리기로 한 결정은 단순한 학사 구조 변경을 넘어 한국 고등교육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고한다.

UNIST는 지난 11일 이사회를 열고 AI융합대학 신설 안건을 의결했다. 새 체계는 오는 9월 공식 출범하며, 2027학년도 입학생부터 적용된다. 이번 개편의 핵심은 기존의 학과 중심 운영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AI 전공 통합 관리' 체제로 전환했다는 점이다. 학부 교육은 전기전자공학, 컴퓨터공학, 인공지능, 산업공학, 바이오메디컬공학, 인간중심디자인공학 등 6개 기반 전공을 중심으로 운영되지만, 학생들은 여기에 조선해양, 우주항공, 방산, 소재, 반도체, 의료 등 국가·지역 전략산업과 연계한 'AX융합전공' 8개를 자유롭게 조합해 자신만의 교육과정을 설계할 수 있다. 이른바 '전공 모듈형' 교육 체계의 도입이다.

눈에 띄는 것은 UNIST가 이번 개편을 단순한 학제 개편이 아닌 '교육-연구-산업'의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계기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UNIST가 내세운 대표 프로그램인 '인더스트리 인스파이어 프로젝트(IIL)'는 기업과 연구기관이 제시한 실제 문제와 데이터를 학부 수업에 직접 활용하는 방식이다.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배운 AI 지식을 바탕으로 산업 현장의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 이 과정에서 쌓은 역량은 자연스럽게 대학원 연구로 이어지고, 연구 성과는 다시 지역 산업의 AI 전환에 활용되는 '랩 투 팩토리(Lab to Factory)' 체계로 확장된다. 학부에서 시작된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대학원을 거쳐 실제 산업 현장에 적용되는 순환 구조를 설계한 것이다.

이번 UNIST의 움직임은 정부의 국가 AI 전환 정책과 4대 과학기술원의 AX(AI 전환) 전략과 맞물려 있다. 특히 동남권은 조선해양, 자동차, 원자력 등 전통 제조업의 비중이 높은 지역으로, 최근 AI 기반의 스마트 조선소 전환, 방산 첨단화, 우주항공 클러스터 조성 등 산업 전반의 대전환이 진행 중이다. UNIST는 이러한 지역 산업의 수요를 교육과정에 직접 반영함으로써 '지역 전략산업과 대학 교육의 동반 성장'이라는 시너지를 노리고 있다. 실제로 UNIST는 이번 개편을 통해 학사과정과 대학원 국비장학생 정원을 각각 100명씩 확대하기로 했는데, 이는 AI와 전략산업 분야의 인재 양성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종래 UNIST 총장은 "AI융합대학은 산업 현장의 문제를 교육과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아 해법을 새로운 기술로 구현하는 거점인 국가산업 AX넥서스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UNIST가 단순히 AI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을 넘어, 지역 산업의 AI 전환을 이끄는 혁신 허브로 자리매김하겠다는 포부로 읽힌다.

이번 UNIST의 결정은 한국 고등교육계에 여러 시사점을 던진다. 첫째, 학과 간 경계를 허무는 '모듈형 교육과정'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국내 대학들도 융합전공이나 연계전공을 통해 학제 간 교육을 시도해 왔지만, 대부분 부수적인 프로그램에 그쳤다. UNIST는 애초에 학과 중심 체계 자체를 없앰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융합 교육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학생 선택권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 수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교육 모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둘째, 대학과 지역 산업의 연계 강화라는 측면에서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동안 국내 이공계 대학의 교육과정은 학문적 완결성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산업 현장의 요구와 괴리가 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UNIST는 지역 전략산업의 현안을 교육과정에 직접 끌어들임으로써 '대학이 곧 지역 산업의 R&D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지방대학의 존립 위기가 논의되는 상황에서 대학의 새로운 생존 전략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물론 해결해야 할 과제도 남아 있다. AI융합대학의 성공은 결국 산업계의 적극적인 참여에 달려 있다. 기업들이 실제 문제와 데이터를 제공하고, 교수진과 함께 학생들을 지도하는 협력 체계가 제대로 작동해야만 '현장 맞춤형 인재 양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또한 학과 체계의 해체가 연구 조직의 정체성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학부 교육의 유연성 확대와 연구의 전문성 유지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향후 과제로 지적된다.

AI 기술이 산업 전반을 재편하고 있는 지금, 대학 교육도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UNIST의 AI융합대학 개편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대한 가장 과감한 실험 중 하나다. 교육의 틀을 바꾸는 일이 단기간에 결실을 맺기는 어렵다. 그러나 학과의 벽을 넘어선 융합 교육, 산업 현장과 연결된 문제 해결형 학습, 그리고 학부-대학원-산업을 잇는 선순환 구조라는 UNIST의 청사진은 한국 고등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실험이 성공할 경우, 다른 과학기술원과 주요 대학들에도 적지 않은 파급 효과를 미칠 것으로 보인다. AI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대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UNIST가 먼저 쓰기 시작한 셈이다.